단편영화 '시린 귀를 감싸며'
우연히 평화방송에서 '시린 귀를 감싸며'라는 제목의 단편영화를 보게 되었다. 가수를 꿈꾸는 여학생(대학생이라는 설정으로 나온다.)이 바라보는 세상과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영화였다.(전체를 보지는 못했으니 이렇게 단정짓기는 힘들지 모르겠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을 둘러싼 주위 상황들을 약간은 어두운 시선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시선이 고정되었던 한 장면.
카메라는 둥근 탁자들이 놓여있고, 탁자들을 둘러싸고 고기를 구워먹는 대학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기집을 포착하고 있다. 중앙에 주인공의 일행 5~6명이 앉아서 고기를 구우며 술을 마시고 있고, 일행의 가운데에 나이가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으로 보이는 선배가 앉아서 주변의 후배들에게 술을 권하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대화하는 것으로 보아 이 사람은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고학번으로 보인다. 이 사람은 벌써 취했고 시종 취한 말투로 이야기한다.
이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정확하지는 않지만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만약에 영화를 제작하신 분들이 이 글을 보고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할말은 없다. 전체를 보지 못했을뿐더러 특정 장면 또한 내 머리 속에서 재구성된 측면이 있으니.)
"내가 군대 다녀와서 도서관에만 있었잖냐."
...
"내가 올해는 이렇게 되었지만(취업이 되지 않았지만) 자존심이 있지. 기다리는거야."
"근데 형! **는 @@(대기업)에 취직했대요."
.....
"(갑자기 이 선배 주인공을 가리키며) 어라, **도 왔네?"
" 근데, 너 아직도 가수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냐?"
"넌 안돼, 가수는 PD하고 잠자고 하는 얘들이 되는거야!"
"(주인공)그걸 선배가 어떻게 알아요?"
"나이 먹으면 알게 돼."
...
마지막에 나오는 "나이 먹으면 알게 돼."라는 말이 압권이다. 어쩌면 내가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는 선배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 부분에 시선이 고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이런 선배가 되지 말아야지'하고 단순하게 생각을 하고 말 문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장면을 통해서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단지 '나쁜 선배'의 모습일까? 즉 가수라는 꿈을 가진 여학생이 현실에서 부딪치는 금전적인 문제라던지, 자신이 재능이 있는가라는 고민 등에 하등 도움이 안되는 이야기를 하는 선배를 단지 나쁜 선배라는 이야기로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을까?
한번 곱씹어 보면서 주인공 여학생이 가지는 고민과 선배가 가지는 고민이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바와 현실 사이의 간격을 좁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가수를 하고 싶다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지만 TV에서 나오는 가수들은 여성의 경우에 외모가 뛰어나고 춤도 잘추며 노래도 잘한다. 뭔가 자기만의 것으로 가수세계에 나서보려 하지만 자신의 여건은 녹녹치 않음을 깨달아간다. 자기가 가진 음악의 경험은 동아리 경험이 전부이니.
반면 졸업을 준비하면서 부딪치는 현실에서 좌절을 느끼는 선배는 이미 마음이 꼬여있는 것이다. 어쩌면 심적인 여유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후배가 가수를 하겠다는 꿈을 가진 것을 알지만 어쩌면 가수가 된다는 것은 자신이 볼 때에는 취업이라는 목표보다 더 커다란 꿈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것이 그리 간단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냉소를 보내는 선배는 이미 많은 좌절을 경험한 상황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가수는 PD와 잠을 자야지 된다는 선배의 이야기는 실력만으로 사회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좌절감이 이입된 표현이다. 거기다 자신의 좌절감을 '나이'를 핑계로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는 코미디까지.(물론 시나리오 작가는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고 우리 사회에서 서열을 짓는 핵심적인 요소인 나이라는 소재를 이용하여 결과적으로 끔찍함을 극대화시키는 효과를 얻었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나이 먹으면 알게 돼.'라는 표현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좌절감은 더욱 커질거야 너는 계속되는 좌절을 감수해야해. 그걸 견뎌낼 수 있겠어?라는 이야기가 아닐지.
따라서 이 부분은 사회진출을 앞에 두고 있는 대다수 대학생들의 경험을 일반화하는데 성공했다고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놓치면 안되는 것이 있다. 이 모든 상황들을 '여성'의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인 여대생의 상황은 앞선 맥락에서 본다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고민이고, 성장의 고민이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동시대의 고민을 넘어서서 여성의 경험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자칫 남성의 경험과 여성의 경험을 무화시킬 수도 있었지만 영화는 이를 극복한다.)
위의 장면에서는 사회진출을 고민하는 여학생의 고민과 좌절이라는 점에서 사회- 여성의 갈등 구도가 담겨져 있고, 술자리 문화와 나이라는 요소를 통해서 남자선배-여자후배의 권력관계에 따른 갈등 구도가 동시에 담겨 있다. 또한 위의 술자리에서 고학번 선배가 아닌 다른 남학생들은 여학생이 겪는 상황에서 방관자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학생(대개는 남학생)-여학생의 입장이 같을 수 없다는 현실 또한 보여주고 있다. 즉 사회-대학사회- 학생(대개는 남학생의 시선)-여학생의 중첩된 갈등 구조가 하나의 장면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장면은 대개의 경우 잘 다루지 못하는 현실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전반적인 허무주의적 색채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런 장면을 보면 궁금해지는 것이다. 누가 만들었는지. 전체 내용은 어땠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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